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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프란치스코

by 시주경제 2025. 5. 13.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태생으로 화공학자와 나이트클럽 경비원으로 잠시 일하다가[8]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생이 되었다. 1969년에 그는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1973년부터 1979년까지 예수회의 아르헨티나 관구장을 지냈다. 1998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2001년에는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2013년 2월 28일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스스로 교황직을 사임한 후에 소집된 콘클라베에서 다수의 표를 얻어 같은 해 3월 13일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에 선출된 그는 교황으로서의 자신의 새 이름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따서 프란치스코라고 명명하였다. 프란치스코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항상 검소함과 겸손함을 잃지 않고 있으며, 사회적 소수자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관용을 촉구한다. 그는 소박하고 격식에 덜 얽매인 형식에 따르는 생활을 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과거에 전임자들이 사도 궁전에 거주했던 데 반해 프란치스코는 성녀 마르타의 집을 자신의 거주지로 선택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교황직에 선출될 당시에 전통적으로 교황 선출자가 전통적으로 착용하는 붉은색 교황용 모제타를 입지 않았으며, 전례를 집전할 때에도 입는 화려한 장식이 없는 검소하고 소박한 제의를 입는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순금으로 주조해왔던 어부의 반지를 도금한 은반지로 교체하였으며, 목에 거는 가슴 십자가는 추기경 시절부터 착용하던 철제 십자가를 그대로 고수하였다.프란치스코는 낙태, 피임, 동성애 등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고 있는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동성애를 죄로 규정하는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동성애자들을 사회적으로 소외시키거나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14] 추기경 시절에 그는 이미 아르헨티나 정부의 동성 결혼 합법화 시도에 대해서 반대한 적이 있었다. 교회의 가르침에 관해서 ‘교회의 아들’로 자처한 그는 낙태에 대해서도 ‘소름이 끼치는 행동’이라고 언급하였으며, 교회 내에서 여성의 역할 확대를 강조했지만, 여성의 사제 서품 문제에 대해서는 교회가 이미 안 된다고 밝혔다며 교회의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미혼모 자녀의 세례를 거부하는 사제들에게는 “사람들과 구원의 길 사이를 갈라놓는 위선자들”이라고 질책한 바 있다. 더불어, 그는 “예수님을 믿지만, 교회에는 가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하였다.